[KBO Legend] 대한민국 ‘국보 투수’, ‘무등산 폭격기’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KBO Legend] 대한민국 ‘국보 투수’, ‘무등산 폭격기’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직구와 슬라이더로 한·일(韓·日)야구 20년을 평정한 국보,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사진|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국보급’ 투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출처.KIA 타이거즈)

‘국보급 투수’의 화려한 등장, 1986년 선동열

한국 축구가 차범근, 한국 농구가 허재라면, 한국 야구는 선동열이다. 다시 말해 선동열은 곧 한국 야구였다. 직구와 슬라이더로 한·일 야구 20년을 평정한, 진정한 에이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아시아 야구 역사를 다시 쓴 이가 선동열이었다.

사진|광주일고 ‘괴물 투수’ 시절의 선동열 (출처.중앙일보)

1980년, 빚고을 광주가 뒤숭숭하던 그때 그 시절, 훗날 국보(國寶)라 불리는 투수 하나가 등장했다. 중학교 때 이미 130km/h중반, 고등학교 때 140km/h 후반대의 구속을 던졌던 선동열은 자타공인 ‘괴물’이었다.


먹는 게 부족하고, 관리가 허술했던 30년 전 야구 환경을 생각해 볼 때, 선동열은 타고난 투수였다. 광주일고 3학년인 1980년에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더 이상 고교 무대에 적수가 없음을 알렸다. 초미의 관심사는 선동열이 ‘어느 대학을 가느냐?!’였다.

사진|1980년, 대학 야구 스토브리그는 쟁쟁한 고교 대어들 덕분에 활활 타올랐다. 선동열, 윤학길, 이순철 등 투·타 유망주들의 진로를 예상한 기사 (출처.동아일보)

1981년, 대학 졸업반이던 최동원과 김시진, 김용남 우완 빅3가 한꺼번에 실업팀으로 향하면서 선동열-윤학길-이길환-정삼흠-이상군으로 이어지는 고교 대어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 이 배경에는 A급 투수 한 명만 잡아도 대학 무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전망이 깔려있었다.


투수력 때문에 고전한 고려대가 먼저 치고 나갔다. 선동열, 정삼흠에 이어 중앙고 출신의 안언학과 전주고 강상진마저 확보한 것이다. 이에 뒤질세라 연세대도 윤학길, 이길환을 스카우트하며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 선동열은 대표팀에 승선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매년 대표팀 승선 명단 맨 앞자리는 선동열이었다. 프로야구가 생긴 1982년 9월도 다르지 않았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고려대 2학년 선동열

현재 서울 잠실구장의 건립 목적이었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1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대학-실업 스타들의 경연장이었다. 아마추어 대회였던 세계야구선수권을 위해 프로 입문까지 1년을 미룬 해프닝도 있었다. 최동원과 임호균, 김재박, 심재원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의 줄다리기 끝에 6명의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끌어들였지만, 숙적 일본과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최고의 대학 선수들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우홍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든 대학생들이 바로 선동열과 한대화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풋내기로 여겼던 대학생 두 명이 대형사고를 치게 될지는...


위기는 첫 경기부터 찾아왔다. 유럽의 약체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1-2 패배를 당한 것이다. 국내 최고 우완 투수라는 김시진과 최동원이 나왔기에 뼈아픈 결과였다.


대회의 향방이 걸린 미국과의 2차전. 선발은 선동열이었다. 1회 연타를 맞으며 선취점을 내주기는 했지만, 이후 9회까지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선보이며 2-1 완투승을 거둔다.


미국을 잠재운 선동열의 투구에 반한 어우홍 감독은 이후 주요 경기마다 선동열을 내보내며 우승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복병인 대만(당시 자유중국)전에서는 완봉승을, 캐나다전에서는 2이닝 마무리를 지으며 선동열은 승리 보증 수표로 떠올랐다.


그리고 남은 한 경기. 피할 수 없는 일본과 사실상의 결승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발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사진|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의 주역인 선동열과 한대화를 소개한 기사. 당시 기사는 고려대 2학년생 선동열을 두둑한 배짱에 강속구가 일품인 투수라고 평가했다 (출처.경향신문)

역사는 8회 말에 쓰였다. 1회 초 2점을 먼저 내준 한국은 7회까지 이렇다 할 찬스 하나 잡지 못했지만, 심재원과 김정수의 연속 안타를 엮어 동점 찬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온 역사적 장면 2번 타자 김재박이 훗날 캥거루 번트, 개구리 번트로 불리는 기가 막힌 스퀴즈 번트를 대면서 동점에 성공한다. 이어 이해창이 중전 안타를 때려내 1사 1, 3루가 됐지만, 장효조의 땅볼로 3루 주자가 횡사하면서 상황은 2사 1, 2루가 된다.


최후의 타석에 들어선 5번 타자 한대화. 동국대 4학년이던 한대화는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홈런으로 꼽히는, 좌측 폴대를 강타하는 역전 쓰리런 홈런을 때려내면서 선동열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프로야구 원년이던 그해, 한국 야구는 두 대학생의 패기로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다.


MVP는 혼자 팀의 3승과 평균자책점 0.31을 기록한 신예 에이스 선동열의 몫이었다. 선동열 본인으로서는 전해 열렸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받은 MVP보다 훨씬 값진 트로피였다.


‘무등산 폭격기’의 1986년, 24승 평균자책점 0.99

선동열이 대학에서 4년을 보내는 동안, 프로야구에는 매년 불세출의 투수들이 원맨쇼를 연출했다. 원년이던 1982년에는 세계 신기록이던 22연승을 올린 OB 베어스 박철순과 그해 최고의 좌완이었던 삼성 라이온즈 이선희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현재까지 프로야구 최다승 기록인 30승 투수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가 있었다.


1984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기록하며 롯데 자이언츠의 돌풍을 이끈 최동원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1985년, 진정한 태양(SUN)이 한반도를 비췄다.


신인 선동열에게 프로 첫 해는 지옥과 천당이었다. 해외 진출을 위해 프로 입성을 포기하려 했지만, 해태 타이거즈 팬들의 성화와 당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광주에 머물렀던 선동열은, 이 일이 빌미가 돼 전반기 출전이 금지된 것이다.


결국 선동열의 데뷔는 후반기로 미뤄졌다. 1985년 첫 데뷔전에서 삼성의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을 상대로 호투 끝에 패했지만, 후반기 구원승으로만 7승(4패)을 거뒀다. 평균자책점은 단 1.70. 향후 한국 프로야구 10년을 뒤흔든 ‘무등산 폭격기’의 시작점이었다.

사진|1987년 올스타전에서 만난 한국 야구 최고의 라이벌, 선동열(왼쪽)과 최동원(오른쪽) (출처.KBO)

‘입단 파동’으로 생애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신인왕은 팀 동료이자 라이벌인 이순철에게 돌아갔지만, 선동열에게는 1986년이 있었다. 선발로 22경기, 구원으로 17경기를 나온 그해 선동열은 혼자 24승을 거두며 팀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됐다.

사진|우타자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선동열의 슬라이더 (출처.MLB PARK)

사진|커브처럼 큰 각을 그리며 떨어지는 선동열의 슬러브 (출처.MLB PARK)

사진|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선동열의 슬러브 (출처.MLB PARK)

8월부터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을 세웠다. 8월 27일 광주 빙그레 이글스전을 시작으로 이듬해 4월까지 49.1이닝 무실점 행진을 기록한 것이다. , 148번의 아웃 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1실점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무실점 행진은 곧 믿기지 않는 평균자책점으로 이어졌다. 262.2이닝을 던지며 기록한 평균자책점이 0.99. 선동열의 나이 겨우 23살이었다.


6번의 우승 그리고 일본 진출

선동열의 직구와 슬라이더는 멈출 줄 몰랐다. 선동열이 던지면 곧 승리였고, 팀은 우승이었다. 1986년을 시작으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를 이룬 ‘해태 왕조’에는 언제나 선동열이 있었다.


물론 시즌 막판에는 어깨에 탈이 나 몇 시즌은 가을야구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해태에 있던 11년간 포스트시즌에서 20경기에 나와 8승 3패 평균자책점 2.24의 호성적을 거뒀다. 특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은 후 두손을 번쩍 들고 포수 장채근과 기쁨을 나누는 장면은 지금도 한국시리즈를 회상할 때의 단골 장면이다.

사진|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후 두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는 선동열 (출처.KIA 타이거즈)

1993년은 선동열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하나는 선발에서 마무리로 전향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 야구 최고의 투·타 콤비를 이룬 고교 후배 이종범과 짝을 이뤘다는 것이다.


선동열은 원체 선발과 구원을 자주 오갔던 탓인지 구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1993년에는 선발투수와 맞먹는 126.1이닝을 던져 31세이브를, 1995년에는 109.1이닝을 던져 33세이브를 기록, 2번의 구원왕에 오른다.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면 상대팀 덕아웃이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일화는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해태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8년간 6번을 우승하는 동안 선동열은 5번은 선발로, 1번은 마무리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선동열은 팀을 우승시킬 줄 아는 투수였다.


마무리 전향 후 3년. 선동열은 선수로서 기로에 섰다. 한국에 남을 것이냐, 해외로 나갈 것이냐. 본인은 해외 진출이 꿈이었지만, 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선동열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미·일(美·日) 프로야구 팀들의 러브콜 끝에 선동열은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향한다. 몬스터 시즌이던 1986년 후 정확히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진출 첫 해였던 1996년은 야구 인생 최악의 시즌이었다. 적응 실패로 단 5승(3패) 3세이브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하지만 2년차 시즌부터 구위가 돌아왔다. 무려 38세이브를 따내며 세이브 2위를 기록했다.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152km/h 포심 패스트볼 (출처.MLB PARK)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147km/h 투심 패스트볼 (출처.MLB PARK)

이종범, 이상훈 등 후배들과 함께 해 힘도 났다. 적응이 끝난 국보급 투수는 1999년까지 57세이브를 추가하며 일본 프로야구 4시즌 통산 98세이브를 수확했다. 2011시즌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약했던 임창용이 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한국인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한 선동열(왼쪽)과 이종범(오른쪽) (출처.중앙일보)

4년 동안 선동열이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단순한 세이브 숫자가 아니라, ‘나고야의 태양’, ‘역대 최고 주일외교관’이라는 수식어였다.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그의 활약 덕분에 팀은 1999년 우승을 차지했다.

밀레니엄 시대를 눈앞에 두고 선동열은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선동열이 성인 무대로 나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무해 동안 선동열은 위대한 투구를 야구 팬들에게 선보였다.


직구와 슬라이더. 이 단순한 조합으로 선동열은 한·일 프로 생활을 통틀어 1,844이닝을 던졌으며 156번의 승리와 230번의 세이브를 따냈다. 평균자책점 1위는 무려 8번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선동열은 투수 각 부문에서 최다, 최고 기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선수로 남아있다. 또한 선동열은 한국 선수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아니 ‘강력하게’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마운드에서 왕조를 이룬 사나이, 야구를 통해 국보로 불린 사나이, 선동열은 곧 한국 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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