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Legend] 가슴 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그 이름, No.47 ‘야생마’ LG 트윈스 이상훈

[KBO Legend] 가슴 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그 이름, No.47 ‘야생마’ LG 트윈스 이상훈

좌완 선발 20승, 1995년 LG 트윈스 ‘야생마’ 이상훈

사진|휘날리는 생머리, 파워풀한 와인드업. LG 트윈스 No.47 야생마 이상훈 (출처.LG 트윈스)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없다. ‘좌완 선발 20승’이라는 단순한 단어 나열이 이토록 멋있을 수가 있는가. 막연히 부러울 수가 있는가. 우리의 희망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바로 이상훈이 해낸, 우리에게는 기록 이상의 감동, 그리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1995년의 이야기다.

 

‘자존심을 세워달라’며 프로 입단 당시부터 구단과 치열한 계약금 다툼을 벌이던 이상훈. 그러나 이상훈은 끝내 구단의 의사를 수용한 채 꿈에 그리던 LG 트윈스에 입성한다.

 

데뷔 첫 해인 1993년 9승 9패 평균자책점 3.76을 시작으로, 1994년 18승 8패 평균자책점 2.47을 기록.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 · 흔히 2년차 징크스라 부른다)’도 화끈하게 불태워 버린 채 다승왕 고지에 오르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연이어 1995년에는 발전과 진화를 거듭, 단숨에 꿈의 20승(5패 평균자책점 2.01) 고지를 점령하며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른다. 20승이란, 1990년 대학 선배 선동열(22승)이 기록한 이후 아무도 넘보지 못한 벽이었다.

 

5년 만의 대기록이자, 선발 20승은 김시진(1987년 23승) 이후 8년 만의 대기록이었다. 이후 순수 선발 20승은 세월이 지나고 강산이 변해 2007년 다니엘 리오스(두산 베어스)에게 그 영광이 주어졌다(1999년 극악의 타고투저 시절 정민태(현대 유니콘스)는 KBO리그를 씹어먹은 단연코 돋보이는 20승 투수였지만, 선발승은 19승이었다).

 

철저한 마운드 분업과 선발 로테이션이 보편화된 199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시즌 20승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다.

 

그로부터 훗날 22년 뒤, KIA 타이거즈의 양현종이 20승 5패를 기록하며 ‘좌완 선발 20승’ 투수로서 두 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사진|대학 4학년이 되서야 빛을 발한 이상훈은 그 해 대한야구협회로부터 대학 최고투수로 선정됐다. 1992년 성적은 12승 2패에 평균자책점 2.39. 서울권 두 팀의 극심한 러브콜을 받은 이유였다 (출처.동아일보)

1995년 시즌 후 열린 한·일 슈퍼게임의 선발투수 역시 단연코 ‘20승 선발’ 이상훈의 몫이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우리나라의 프로야구와 비교해 한 수 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변화무쌍하고 세밀한 플레이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득점 기회조차 원천봉쇄 시킨 한국 투수들이 마운드에 있었다. 이들이 마운드 위에서 보이는 풍모와 구위는 일본 타자들을 압도했다.

 

바로 KBO리그를 대표하는 투수의 자존심, 이상훈과 김용수, 구대성 그리고 선동열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 투수들은 한·일 슈퍼게임 1차전 선발과 중간, 마무리로 나와 수준 높은 일본 타선을 단 5안타 완봉으로 막아냈다.

사진|한·일 슈퍼게임 이상훈의 활약 (출처.KBS N SPORTS-The 레전드)

마운드가 높으면 결코 지지는 않는 법이다. 1차전에서 6.2이닝 동안의 무실점 호투. 그렇게 ‘이상훈’이라는 이름을 일본 열도에 알리며 0-0 무승부를 이끌어냈고, 이상훈은 1995년 한·일 슈퍼게임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그라운드 위를 질주하는 47번 야생마

이상훈은 길들여지지 않은 선수였다. 대학 시절 잦은 숙소 이탈로 인해 지어진 별명이 ‘빠삐용’일 정도였다. 그렇게 그라운드 밖에서 더 열심히 뛰어다녔던 이상훈이 달라졌다. 이제는 그라운드 위의 야생마, 자신의 진면목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프로야구에 무언가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기고 싶다”던 고려대 졸업반 투수는 LG 입단 3년 만에 당당히 팀을 넘어 KBO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의 입지를 다졌다.

 

고려대 4학년 시절인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워 아마야구를 놀라게 했던 이상훈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단숨에 끌어왔다.

사진|이상훈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기는 고려대 4학년이던 1992년, 잠실에서 열린 고·연전이다. 이 경기에서 이상훈은 연세대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대학 생활의 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출처.한국스포츠통신)

이상훈의 성공요인도 결국 교과서에 적힌 국·영·수 위주의 공부와 마찬가지였다. 그라운드에서 하는 활동, 야구에 있어 이상훈은 엄격했고 자기 관리에 누구보다 온 힘을 쏟았다.

 

이상훈의 일거수일투족은 1990년대 ‘셀레브레티(Celebrity · 대중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다웠다. 이상훈의 인터뷰는 화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상훈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스타가 된 이후에도 이상훈은 연습시간에 가장 먼저 오는 선수였고,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는 선수였다. 특히나 Rock이나 Pop 스타에 어울릴 법한 긴 머리는 야구를 떠나, 시대적인 ‘파격’이었다.

 

야구 선수로서의 모습으로도 ‘파격’ 그 자체였다. 덕아웃과 마운드 사이를 늘 전력질주로 뛰어 다니는 이상훈의 모습은 LG 팬을 떠나 모든 야구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로망’이자 이상훈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모습이 되었다.

 

9이닝, 한 경기를 온전히 소유한 채로도 끝까지 힘 있는 구위와 마운드 위에서의 ‘아우라’를 보여줄 수 있는 스태미너, 그리고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 야수들을 마치 영화 속 조연으로 만들게끔 하는 최고의 ‘존재감 있는’ 주연, 야구 팬들로 하여금 보고 또 보고 싶게 하는 기대를 가지게 한 사람. 그가 바로 ‘야생마’ 이상훈이었다.

 

‘영웅’이 되기 전 야생마도 학생 시절 평범한 야구 선수였다. 미국 메이저리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좌완 투수, ‘야구에 대한 내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You can't measure heart with a radar gun)’는 야구 명언을 남긴 톰 글래빈을 존경한 이상훈은 주저 없이 좌완의 상징인 47번을 택했다.

 

이상훈이 걸어온 백넘버 47번의 인생은 곧 수많은 후배들이 따르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각 팀의 대표적인 왼손 파이어볼러의 대표 백넘버가 되었다.

 

그로 인해, 특히나 LG의 47번은 이상훈의 번호로 오롯이 영구결번이 되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백넘버 이상의 책임감을 부여했다.

 

비둘기 하면 평화이듯 한국 야구에서의 47번은 이상훈 만의 번호가 되어버렸다. 비록 영구결번이 되어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훈의 존재를 부각시키게 되었다.

 

이상훈의 실제 활약을 미쳐 보지 못한 최근의 신인 선수들까지도 이상훈은 여전한 ‘롤모델’로 각인되어 있다. ‘국보 투수’는 선동열이듯, 한국 야구 좌완 투수의 아이콘은 ‘야생마’ 이상훈인 셈이다.

사진|2000년,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입게 된 ‘삼손’ 이상훈 (출처.MLB PARK)

이상훈과 해외 진출 이야기, 1998년 IMF

1995년 OB 베어스의 에이스 김상진과 LG의 에이스 이상훈의 대결은 실로 프로야구 흥행에 대단한 촉매제였다. ‘한지붕 두가족’의 라이벌, 왼손을 대표하는 이상훈과 오른손을 대표하는 김상진의 대결은 당시 9시 메인 뉴스를 제 시간에 방송하지 못하게 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고 스포츠 일간지의 메인을 독차지한 이슈였다.

 

실로 선동열-최동원 이후의 《퍼펙트게임》을 찾노라면 감히 그 당시 잠실구장 경기들을 손꼽을 것이다. 이상훈은 그렇게 한국 야구의 스타가 되었고 팬들을 경기장으로 끌어 모았다.

 

꾸준히 더 큰 무대를 꿈꾸어 왔던 이상훈은 현실에 대한 ‘안주’보다는 ‘도전’을 택했다. 해외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이상훈이 더 큰 무대를 꿈꾸어 왔던 때, 우리나라는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이른바 IMF라는 국가적 대시련이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IMF는 오히려 이상훈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모든 면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던 IMF 시절, 많은 일간지들은 이상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스포츠 지면 확장 경쟁에 돌입했다. 마치 미국과 옛 소비에트 연방의 군비 경쟁처럼 말이다.

 

전문 스포츠 일간지들도 창간이 잇따랐다. 일반 신문들이 각종 게이트와 비리, 경제 위기들로 어둡게 채워질 무렵,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스포츠, 바로 그것뿐이었다.

 

덩달아 해외에서의 신선한 낭보도 이어졌다. 박찬호, 박세리로 대표되는 그 시절 해외파 스타 플레이어들은 돈 많고 강한 나라,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로 대변되는 선수들을 힘차게 무찔러 나가며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이는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큰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운동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막연히 ‘가보고 싶다’가 아닌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새로운 도전 무대에 대한 동기부여를 주었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활약은 한국 야구계의 신선한 자극제이자 큰 변화와 영향력을 끼쳤다. 물론 양날의 검이 있었지만 말이다.

 

같은 동양계 투수, 일본 프로야구 출신인 노모 히데오와의 활약은 일부 북미, 남미 등에 편향되어 있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단숨어 태평양 건너 작은 반도의 나라 대한민국에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자본 앞에 가뜩이나 돈주머니를 줄여가는 상대 열세인 국내 야구 시장과 대조, 한국 야구 유망주들이 줄줄이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프로 선수들이라고 예외란 없었다.

사진|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이상훈(왼쪽)의 모습. 이상훈은 선배 선동렬(가운데), 이종범(오른쪽)과 함께 1999년 팀의 재팬시리즈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상훈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선수였다 (출처.MLB PARK)

노모가 길을 열고, 박찬호가 땅을 단단히 다지며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고 있을 무렵, 적기에 이상훈이 미국 진출 도전을 선언한 셈이다. 이상훈은 포스팅 시스템을 택했다. 바로 지난해(2011년) 정대현의 FA 신분과는 다른 ‘공개 입찰 제도’였다.

 

이상훈의 트라이 아웃은 해외 진출을 꿈꾸는 수많은 유망주와 프로 선수들에게 아직까지도 하나의 잣대가 되고 있다. 당시 이상훈의 트라이 아웃 시행에 대해 비정상적 요소와 의문점이 제기되며 많은 말들이 설왕설래했지만, 어찌 되었던 이상훈의 최종 협상가는 60만 달러였다.

 

예상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 한국 야구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손꼽힌다. 이상훈은 우선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위해 잠시 꿈을 접은 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이라는 차선책을 택한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 진출의 토대로 상대적으로 검증된 일본 리그를 택한 셈이다.

 

이상훈은 2년 간 22억 엔(약 22억 원) 조건의 임대 형식으로 주니치로 합류하게 된다(계약금 5천만 엔 · 연봉 8천 만엔 ·액 1억 3천만 엔, 약 14억 3천만 원의 계약). 당시 주니치는 LG와의 자매 구단 관계라 이적 절차에 대해서는 순조롭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많은 전·후 사정과 이해관계가 엇갈렸지만 이렇게 이상훈의 해외 야구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상훈과 선동열 그리고 이종범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3인방은 주니치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사진|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이상훈의 투구 모습 (출처.MLB PARK)

사진|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이상훈의 투구 모습 (출처.MLB PARK)

사진|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이상훈의 투구 모습 (출처.MLB PARK)

이상훈이 일본에서 활약한 2년 동안 거둔 성적은 39경기 7승 5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83. 이상훈은 ‘나고야의 태양’ 마무리 투수 선동열 앞에서 팀의 승리를 책임지는 주축 좌완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일본에서의 성적을 발판으로 이상훈은 미국 야구의 명문 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와 총액 470만 달러라는 대형 계약을 체결한다. 불과 2년 만에 8배로 수직 상승한 계약금이었다. 당시 이상훈의 세부 계약 조건은 불펜 투수, 그리고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 보장이었다.

 

보스턴에서의 기록은 불과 9경기 출장에 불과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봤던 갈깃머리 그 모습 그대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른 모습은 우리 국민에게 박찬호 이외에 또 다른 메이저리거의 배출, 더욱이 국내 프로야구 무대를 거친 한국 프로야구의 ‘자랑’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야구 역사는 이상훈을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과 함께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로 또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야구, 그 이상의 모습. 영화같은 삶

이상훈은 2002년, 당시 프로 스포츠 최고 연봉을 받고 LG로 돌아온다. 연봉은 4억 7천만 원. 이상훈의 연봉 적정성에 대해 많은 사회적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야구 팬들에게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훈은 국내에 복귀하자마자 당시 LG 감독을 맡고 있던 김성근 감독과 함께 기존 ‘샌님’ 이미지의 LG를 ‘잡초’같이 끈끈하고 지독한 생명력을 가진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연출했다. 비록 불운한 조연, LG 팬들에게는 지독히도 슬픈 드라마 속 시련의 주인공이었지만 말이다.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이상훈은 3경기 연속 등판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도 박빙의 상황이 되자 자진해서 불펜으로 향하며 김성근 감독에게 남긴 말이다.

 

한국시리즈 6차전, 이승엽에게 허용한 동점 3점 홈런은 투수가 이상훈이라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선수, ‘칠 테면 쳐봐라’라는 배짱 있는 그의 투구가 담겨 있어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웠던 명승부로 더욱 각인되고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가 이상훈에게 환호했던 모습은 단순히 빠른 공과 정확한 제구력, 날카로운 변화구와 같은 일반적인 야구 실력을 떠나서였다.

 

그의 외모, 결코 쓰러지지 않을 듯한 강인한 체구와 길게 휘날리는 긴 머릿결. 마운드 위의 당당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순탄치 않은 인생 극복기, 그리고 지나치리만큼 넘쳤던 그의 자신감. 이 모두 합해 이상훈의 야구가 아닌 인생철학을 존경하고 응원했는지 모른다.

 

이상훈이라서 멋졌던 장면들이 너무나 많았다. 마운드에서는 항상 자신의 실력을 100% 쏟아부었고, 그로 인해 팀은 승리했다.

 

이상훈의 트레이드 마크인 갈색 갈깃머리는 별명을 떠나 실제 선수 등록명에 사용되기도 했다. 게임에서나 어울릴 법한 이름, 바로 주니치 시절의 ‘삼손 리’.

 

프로에서의 찬란한 영광과는 어울리지 않은 학생 시절 빠삐용 인생, 2003년 구원투수로서의 화려한 타이틀 이후 구단 간의 마찰 등으로 급하게 진행된 2004년 파란만장했던 은퇴 상황.

 

누구보다 자신의 팀, LG를 사랑한 이상훈이 SK 와이번스의 유니폼을 입고 6억 원의 연봉을 포기하며 과감히 은퇴한 장면. 현재 제2의 인생마저도, 서로 어울리지 않아 묘하게 아름다운 ‘아이러니’함이 이상훈의 매력을 담을 수 있는 한 단어다.

사진|다시 돌아온 한국 무대에서 마무리로 활약하던 2002시즌 이상훈의 모습 (출처.LG 트윈스)

야구계를 떠나 있지만 이상훈의 인생을 담은 영화 엔딩 크레딧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야구 선수 그리고 사업가, 음악인, 코치 또 해설가로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그가 때로는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지만, 자신의 꿈을 쫓는 이상훈의 모습은 항상 진로와 도전에 대해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선수 이상훈은 우리의 기억 속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인간 이상훈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고 선수 이상훈은 레전드 야구 선수를 넘어 ‘영원히 꿈꾸는 인간’, 여전한 우리의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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